역사 속 전사들 - 5. 고구려 개마무사
고구려하면 떠오르는 것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만주벌판을 달리는 고구려의 개마무사를 떠오를것입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이름처럼 갑옷을 두른 말을 탄 '철갑 기병(마갑 기병)'을 의미합니다.

개마무사는 엄청난 위력으로 적진을 돌파해서 대형을 무너뜨리는, 오늘날의 전차(탱크)에 해당되는 역할을 했으며,
평야 또는 초원이 많은 만주에서 큰 파괴력을 가졌을거라 생각됩니다. 또한 만주 지역의 풍부한 철광석 덕분에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강력한 중장기병대를 창설할 수 있었던거라 추측됩니다.

고구려 개마무사에 대한 기록상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구려의 11대 군주인 동천왕 시기 위나라 군과 대적할 때, 철기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시작으로 하지만, 역사상 철기라는 말은 철갑으로 무장한 군마와 병사 외에도 정예 기병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 경우도 많아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전자인 철갑으로 무장한 군마와 병사를 말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구려 개마무사의 시작으로는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
첫째, 농경과 유목, 수렵을 병행하는 환경 속에서 우수한 제철기술을 보유한 고구려가 자체적으로 개발한 '찰갑'을 이용해서 찰갑 기병대를 육성했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둘째, 또 다른 의견으로는 북중국이나 모용선비와의 대립과 교류 속에서 전파되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선비족은 고구려의 2대 군주인 '유리명왕' 시기부터 고구려의 '부용 세력' 이라는 점과 유목민족이었던 선비가 고구려만큼의 경제력과 기술력을 지녔을지 의문이 듭니다. 오히려 고구려가 이들에게 '개갑'(철갑 기병의 장비 혹은 기술력)을 공급한 것이라는 의견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의 견해든 숱한 전란의 시대에서 우수한 기술을 '개발'하거나 또는 '차용'하여 동북아시아에 강대국으로 국가를 성장시킨 고구려의 저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부용 시력 : 대국이 소국의 고유세력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대국에게 '노동력'과 '병력'을 지원.

개마무사의 무장으로 먼저 군마의 갑옷인 '개마'를 살펴보면 말의 투구와 갑옷 그리고 '등자'와 '편자'로 구성되었습니다. 말 투구는 적의 근접 공격이나 원거리 공격으로부터 말을 보호해주었고, 등자는 기수가 보다 원활히 말위에서
자유자재로 무기(무구)를 사용하고 말을 유연하게 몰 수 있었습니다. 편자는 지면과 말발굽의 마력찰을 높였으며, 말의 발굽에 가해지는 충격을 덜어 주었습니다. 때문에 개마무사의 전마는 땅바닥을 훨씬 힘차게 밟고 달릴 수 있었습니다.
마갑(말 갑옷)의 후미는 독특한 모양의 장식을 장착했고, 이어서 기수는 가로 2~3cm 세로3~4cm의 쇳조각을 가죽끈으로 엮어 제작한 '찰갑'을 착용했습니다.
이로서 기수는 적의 공격에 대항할 방어력을 갖추면서 동시에 활동성이 높아져 보다 수월하게 전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금동못신'은 바닥에 송곳이 있어 적군 보병의 접근을 공격적으로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무기로는 사람 키의 3배에 이르는 장창을 사용했으며, 아울러 보조무기로 1m 정도 길이에 칼자루 뒤끝이 둥근 고리로 되었던 고리자루 칼을 사용했습니다. 그 이외에도 도끼나 철퇴, 활을 쓰면서 적을 상대했을 거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개마무사의 무장에서 볼 때 당시 고구려의 수준 높은 제철기술과 풍부한 철 생산력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개마무사의 주요 임무는 '적진 돌파' 및 '대형 파괴'로 짐작됩니다. 먼저 궁기병이 적의 진형에 혼란을 주고 적에게 빈틈이 생길 때 개마무사는 밀집대형이나 쐐기 대형을 형성하여 적진을 붕괴시켰을 것입니다. 그 후 대기하던 보병들이 돌진하여 전투를 진행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전투가 승전으로 마무리된 뒤 도주하는 적들을 경무장의 궁기병들이 주로 추격을 했지만, 때때로 개마무사도 추격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개마무사는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적에게 확실한 타격을 약속해주는 고구려의 비장의 수입니다.
이러한 집단이었기에 '개마무사'는 고구려 무사들 중에서도 기마술과 무예가 높은 자들이 선발되었고, 아울러 풍부하고 뛰어난 기병 전술 경험과 강인한 용맹함을 지녔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장 자체가 고가, 즉 돈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귀족계층의 인재들, 또는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로 편성했을 것으로 보이며, 말을 보유한 사람도 개마무사로 활동했을 거라 추측합니다.
또한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그 나라(고구려)의 큰 가문들은 밭을 경작하지 않으니 앉아서 먹는 자가 만여 구이다.' 라는 기록과 '꿇어앉아 절하면서 다리 하나를 펴는데 부여와 다르다.' 와 '행보는 모두 달린다', 그리고 고구려도 부여처럼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를 갖추고 있다라는 기록과 어려서부터 글 읽기와 활쏘기를 함께 배웠다 라는 기록과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가난한 마을(窮里)이나 미천한 집안(廝家)까지도 서로 힘써 배우므로, 길거리마다(衢側) 큼지막한 집을 지어 경당(扃堂)이라 부른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子弟)들을 이곳에 보내어 글을 외우고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기록인 《Historiam》에 의하면 '모크리(Mouxri-고구려)라 불리는 나라의 국민들은, 위험에 대처하는 강인한 정신력과 일상처럼 행해지는 혹독한 군사훈련으로 그 투지가 매우 높았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고구려인들은 상무적인 기풍을 지녔으며 더 나아가 전문적인 '전투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어쩌면 개마무사는 이러한 집단 중 출중한 인원을 선발하여 활약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고구려의 개마무사는 한반도 남방의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속국이었던 신라를 구하기 위해서 399년, 고구려의 19대 군주인 광개토태왕이 보병과 기병 5만명을 신라로 보냈습니다.
당시 '판갑 갑옷을 입은 보병' 중심
의 백제,신라 가야 같은 남방 국가들은 고구려의 개마무사의 위력과 기세 앞에 큰 충격을 받았고 ,
이후에 백제, 가야, 신라를 비롯한 한반도 남방국가들은 고구려 개마무사의 무장을 차용하여
자국의 기병력을 강화시켰습니다.

개마무사의 주요 전투로는 244년 위나라 '관구검'이 1만의 군세로 현토를 침공했습니다.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을 인솔하여 출정했고 위 군과 대적했으며, 고구려 군은 비류수에서 위나라 군 3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이어서 양맥 골짜기에서 또다시 위군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생포했습니다. 여세를 몰아서 철기(개마무사) 5천 명을 거느리고 추격하지만 관구검의 전략과 연달아 승리한 나머지 방심한 탓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앞선 두 전투에서 위 군에게 절반이 넘는 피해를 입힌 점을 봤을 때 개마무사를 비롯한 고구려 군의 위용을 엿볼 수 있었고,
394년 7월, 백제의 아신왕 본인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로 쳐들어오자, 광개토태왕도 직접 정예 기병 5천을 이끌고 수곡성 밑에서 싸워 격퇴했습니다. 살아남은 백제군은 밤사이에 달아났다고 합니다. 그 다음 해인 395년 8월에는 진무(아신왕의 외삼촌이자 백제의 장수)가 이끄는 백제군이 또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자 광개토태왕도 다시 한번 친히 정예기병 7천을 이끌고 패수(지금의 예성강)에서 진형을 갖춘 뒤에 백제군을 무찔렀고, 백제군 8천명이 전사했습니다.
399년에 백제,가야, 왜가 연합을 맺고 신라를 침략하자,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400년 광개토태왕은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했습니다.
612년 수나라와의 2차 전쟁 시기 즘 내호아가 이끄는 수나라 수군 4만은 평양성의 60여 리 떨어진 곳에서 고구려 군을 격파했습니다. 첫 승전에 도취한 내호아는 곧장 평양성으로 진격을 하게됩니다.
이때 왕(영양왕)의 이복동생인 고건무(영류왕)는 외성의 문을 개방하고 완전히 비웠습니다. 이에 내호아의 군대는 성안으로 들어가서 약탈에 열중하게 되고, 그 사이 고건무와 500의 결사대는 방심한 내호아군을 격파했습니다.
결국 내호아의 수군은 수천 명 정도만이 살아돌아갔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건무와 휘하 500 결사대의 활약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이 '대승전'이 될 수 있게 이바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